연중 제6주일 2022년 2월 13일 주일
Sixth Sunday in Ordinary Time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고 물가에 심긴 나무 같아 가문 해에도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덧없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이미 위로를 받았으니 불행하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17,5-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Reading I
Jer 17:5-8
Thus says the LORD:
Cursed is the one who trusts in human beings,
who seeks his strength in flesh,
whose heart turns away from the LORD.
He is like a barren bush in the desert
that enjoys no change of season,
but stands in a lava waste,
a salt and empty earth.
Blessed is the one who trusts in the LORD,
whose hope is the LORD.
He is like a tree planted beside the waters
that stretches out its roots to the stream:
it fears not the heat when it comes;
its leaves stay green;
in the year of drought it shows no distress,
but still bears fruit.
화답송
시편 1,1-2.3.4와 6(◎ 40〔39〕,5ㄱㄴ)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Responsorial Psalm
Ps 1:1-2, 3, 4 and 6
R (40:5a) Blessed are they who hope in the Lord.
Blessed the man who follows not
the counsel of the wicked,
nor walks in the way of sinners,
nor sits in the company of the insolent,
but delights in the law of the LORD
and meditates on his law day and night.
R Blessed are they who hope in the Lord.
He is like a tree
planted near running water,
that yields its fruit in due season,
and whose leaves never fade.
Whatever he does, prospers.
R Blessed are they who hope in the Lord.
Not so the wicked, not so;
they are like chaff which the wind drives away.
For the LORD watches over the way of the just,
but the way of the wicked vanishes.
R Blessed are they who hope in the Lord.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12.16-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Reading II
1 Cor 15:12, 16-20
Brothers and sisters:
If Christ is preached as raised from the dead,
how can some among you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of the dead?
If the dead are not raised, neither has Christ been raised,
and 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your faith is vain;
you are still in your sins.
Then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in Christ have perished.
If for this life only we have hoped in Christ,
we are the most pitiable people of all.
But now Christ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e firstfruits of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복음 환호송
루카 6,23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알렐루야
Alleluia
Lk 6:23ab
R. Alleluia, alleluia.
Rejoice and be glad;
your reward will be great in heaven.
R. Alleluia, alleluia.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17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Gospel
Lk 6:17, 20-26
Jesus came down with the Twelve
and stood on a stretch of level ground
with a great crowd of his disciples
and a large number of the people
from all Judea and Jerusalem
and the coastal region of Tyre and Sidon.
And raising his eyes toward his disciples he said: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the kingdom of God is yours.
Blessed are you who are now hungry,
for you will be satisfied.
Blessed are you who are now weeping,
for you will laugh.
Blessed are you when people hate you,
and when they exclude and insult you,
and denounce your name as evil
on account of the Son of Man.
Rejoice and leap for joy on that day!
Behold, your reward will be great in heaven.
For their ancestors treated the prophets in the same way.
But woe to you who are rich,
for you have received your consolation.
Woe to you who are filled now,
for you will be hungry.
Woe to you who laugh now,
for you will grieve and weep.
Woe to you when all speak well of you,
for their ancestors treated the false prophets in this way.”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2 : 구원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가엾이 여기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어
저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78(77),29-30 참조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강론 조건 있는 행복
얼마 전 신자석에서 주일미사를 드릴 때의 일이에요. 바로 뒤에 앉은 꼬마, 삐따닥하게 앉아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던 바로 고 녀석이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랐는지 엄마에게 물었어요. “엄마, 이거 언제 끝나?” 민망하고 부끄러웠어요. 저는… 미사 끝나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던 중이었거든요.
본당 신부로 처음 나가서 소박한 꿈을 품었더랬어요. ‘교우들이 콧노래 부르며 성당에 오고 어깨를 들썩이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그리고 여전히 묻곤 해요. ‘오늘 성당에 온 교우들은 행복했을까?’
신자들의 쉼터이며 하늘과 맞닿은 성당, 그곳에서의 미사에 오가는 길이 설레고 기쁘지 않다면 사제인 저의 책임이 커요. 신자에게는 주일미사가 의무이기는 하지만 또한 권리이기 때문이거든요. 신자도 나름대로 하느님의 축복이 채워지기를 기대하고 준비하셔야 해요. 행복은 누구나 원하지만 공짜 행복은 없으니까요.
“인생은 원래가 꼬인 거예요. 그걸 푸는 게 제 몫이구요.”
서로에게 복 받으라고 말하던 지난 설날, 22살 가브리엘라가 저에게 그랬어요. 철학은 학교에서 배웠는데 철은 그 애한테서 들었어요. 그래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으니 당연히 복을 받아서 누릴 자세와 태도가 필요해요. 깡패에게 건강이, 사기꾼에게 지혜가 축복이라 말할 수는 없잖아요. 불쌍한 사람은 간혹 돕지만 노력하는 사람은 언제나 도와주고 싶어요. 그러니 성의는 남이 아니라 나에게 보여야 맞아요.
공짜는 덫 위에 놓인 것밖에 없다는 속담처럼 은총도 거저는 없어요.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 사람은 성실해야 해요.
어느 백 세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주일미사에 다섯 시간 걸어서 갔어요. 전날 저녁 이후 아무것도 못 먹는 공복재 때문에 아침도 굶고 새벽부터 걸었지요. 미사 보고 오는 길에 먹던 도시락이 생각나네요. 그때 신부님들은 말 타고 다니셨는데… 자가용 있으시지요?”
글 | 이재웅 다미아노 신부(수원교구 국내 연수)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이유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이 있고 나중에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은 지금 당장의 즐거움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보통 심리적 정신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인내와 기다림 속에서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는 힘이 상대적으로 강합니다. 더 좋은 가치에 대한 희망이 현재의 어려움을 견뎌낼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맛있는 것만 골라 먹는 이기적인 식사가 아닙니다. 나의 건강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형제 자매를 위해 상대적으로 맛없는 것들까지 다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맛있는 것을 먹으리라는 희망을 급하게 소모하기보다, 희망을 마음에 품고 삶을 살아갈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행복은 바로 이런 희망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 희망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구분하시는 기준은 단순히 재물을 많이 가졌는가 적게 가졌는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유한 사람’은 자기 삶의 기반을 자신이 소유한 재물에서 찾으려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느님이,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안일한 마음으로 현재의 상태에 안주한 ‘고인 물’이 되어 욕심으로 썩어가기에 불행한 겁니다. 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얻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기에 그들은 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갑니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구원을 향해 흐르기에 늘 생명과 활력이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 ‘진리’를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당장의 이익과 세속의 가치들을 좇는 이들이 잘사는 모습을 보면 억울하고 속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이미 위로를 받았다’고 하십니다. 이는 세속적인 이익과 즐거움이 주는 자극적인 맛에 길들어 삶의 참된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된 슬픈 상태를 의미합니다. ‘불닭볶음면’이 주는 매콤하고 강렬한 맛에 길든 요즘 아이들은 ‘봄동 배추전’이 지닌 자연 본연의 고소한 그 깊은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 참된 맛을 모르기에 찾지 않게 되고 자극적인 맛들만 찾다가 위도 장도 다 버리게 되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이 주는 자극적인 위로를 지금 당장 받겠다고 조바심을 내기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위로의 맛을 제대로 느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결국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비결은 행복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욕망하는 사람이 아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더 더 더’에 집착합니다. 지금 충분히 행복한데도 더 큰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속적인 가치들로 남들보다 ‘비교우위’에 서서 자신이 ‘더 행복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행복을 욕망하고 집착하느라 그 행복을 지금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행 속에서 살게 될 뿐입니다. 반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금 자신이 충분히 행복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줄 알기에,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기에 완전한 행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 평화신문
척박하고 가난해도, 내 옆의 주님 믿기에
제1독서 : 예레 17,5-8 / 제2독서 : 1코린 15,12.16-20 / 복음 : 루카 6,17.20-26
낯설고 힘든 이방인의 일상 속에도
막연한 두려움과 욕심 떨쳐버리고
하느님 부르시는 대로 걸음 옮기면
편안하고 복된 삶 살아갈 수 있어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서 광야의 척박함과 세상에 대한 가난함이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조금 더 가볍게 응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함이 복되고 행복하다고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한국에 있을 때 스스로 조금 바쁘게 지내려고 했었습니다. 젊어서 힘도 있고 일하는 것이 재밌었기 때문입니다. 사제관 칠판에 할 일들, 공부할 것들, 그리고 참여해야 하는 교육이나 세미나들을 많이 적어 놓고 실행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은 아침에 성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하는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고 있던 일에 대한 생각과 계획들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아마 ‘성당 창호 공사를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던 때였는데요. 이런저런 구상들을 해보다가 문득 마음속에서 ‘내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도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많아서인지,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광야의 메마른 곳
몇 년 전에 피정 지도 신부님이 제 외국 생활을 광야로 표현해 주신 적이 있는데요. 낯설고 뭔가 할 수 없다는 느낌이 많았던 곳에서 체험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힘들었습니다. 스스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저를 압박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를 들면 외국어 학원 광고를 많이 봐서인지, 6개월이면 원어민처럼 다른 나라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조급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 외국에 나가면 평화방송 미션에 나오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도 돕고 건물도 짓는 줄 알았습니다. 어떤 가시적인 성과나 결과가 눈에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모습과 상황을 보게 되니까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압박하고 뭔가 찾아서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모습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면역력 결핍 때문인지 원형 탈모도 있었습니다.
6개월 정도 지나서야 내 생각의 틀이나 고정관념이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음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기도를 하면서 ‘외국 생활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의 틀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 내려놓았을 때는 내가 움켜쥐고 있는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이 무엇일지를 생각하고 향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선이 내 생각과 의지가 아니라, 그분이 바라시는 것을 바라보고 향하는 느낌이 들었을 때, 마음이 참 편해졌었습니다. 물론 그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생각이 그리로 향한 자체로 다른 기대나 집착이나 욕심과 같은 불순한 생각들이 놓아지고, 바른 자리에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막 교부의 금언 가운데 “흔히들 사막을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의 연속으로 생각하지만, 그곳에는 수직으로 상승하는 것들이 있다”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제가 경험한 낯선 곳에서도 시선이 주님께로 들어 올려지고 향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물가에 심긴 나무
외국에 살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또 스스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자주 깨닫게 됩니다. 조금 얄미운 느낌이지만, 내가 할 수 없음을 고백할 때 비로소 그분을 찾고 그분에게 시선이 갑니다. 물론 처음에는 원망하는 느낌도 있었고, 질문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현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에게서 자주 듣는 그 ‘현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로는 조금 이해했지만 마음과 삶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답답함이 밀려왔을 때, 다른 지역 수녀님들께 가서 며칠 함께 지내며 성지 순례도 하고 같이 기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수녀님들과 저녁기도를 하고 성체현시를 했는데요. 성체를 한참 바라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기 감실에 계신 예수님도 무언가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구나.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면서 위로도 주시고 일하게도 하셨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존재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살짝 체험되었습니다. 그러한 빛이 살짝 비춰왔을 때,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들면서 ‘여기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시선을 들어올리고, 그분의 삶의 방식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물가에 심겨지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오늘 하루, 나는 세상에 대한 부유함으로 시선도 걸음도 옮길 수 없는 상태인지, 아니면 세상에 대한 가난함으로 가볍게 시선과 발걸음을 주님이 부르시는 대로 옮길 수 있는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 가톨릭신문
상대적 박탈감과 참 행복
운전 중 이쪽 차선의 차들은 꿈쩍도 안 하지만 반대 차선은 텅 비어 있을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낍니다. 반대로 이쪽은 정체가 없지만, 맞은편 차들이 서 있을 때 묘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감정들은 ‘상대적’이며 참 행복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참 행복을 찾아야 할까요? 이번 주 성경 말씀에서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제1독서(예레 17,5-8)는 저주와 행복에 관한 상반된 예언을 들려줍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사람에게 의지하는 이는 주님에게서 떠나 있기에 교만해지기 쉽지만,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겸손 안에 머물기에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제2독서(1코린 15,12.16-20)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믿음·희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희망의 근거이기에, 이 믿음과 희망은 현세적 행복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이처럼 우리 신앙인에게 믿음과 희망과 행복은 현세가 아니라 영원을 지향합니다.
복음(루카 6,17.20-26)은 참 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린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고 모욕을 당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은 다른 이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느끼는 상대적 만족감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은 사람에게 의지하여 주어지는 일시적 보상과 위로와도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은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고통의 현실까지 감내할 수 있는 ‘십자가의 길’에서 찾아야 합니다.
물론 신앙인이라고 해서 ‘하늘’만 바라보며 현실에 무관심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땅’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되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나 만족만을 지향하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도록 초대받은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김상우 바오로 신부 |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내 옆에 나를 지지해주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러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경험은 정확히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2년 전, 그때 저는 군 생활을 하고 있는 병사였습니다. 당시 계급은 이등병이었는데요, 군 생활을 시작한 지도, 그리고 자대배치를 받은 지도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기만 했습니다. 또 어찌나 실수를 많이 하고 어리바리 했는지, 선임병들에게 매일 불려 다니면서 정신 교육을 받고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군 생활을 정말로 잘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서서히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때 저의 내무실에는 그런 저를 묵묵히 응원해주던 일병 3호봉 선임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4달 빨리 군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는데, 당시 그 선임은 자신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을 텐데, 항상 저에게 시간을 내서 맛있는 간식도 사주고, 이런저런 진심을 담은 조언도 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선임병의 진심 어린 지지와 도움에 힘입어, 제 앞에 펼쳐진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졌던 군 생활의 단추들을 잘 끼워가면서 적응하여, 성실히 복무를 다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 선임병에게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아마도 그 선임이 없었다면, 과연 제가 군 생활의 단추를 잘 끼워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면서 어려움 앞에서도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내 옆에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은 기본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삶을 공유해 가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항상 공유된 나의 삶을 바탕으로 해서, 언제 어디서건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나 혹은 기쁘고 행복할 때나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의 삶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행복하다’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현실적인 면모를 보면, 그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픔에 젖어있으며, 누군가에게 모욕과 중상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행복하다’라고 행복을 선언하시는 것이냐면, 그런 그들의 슬픔과 아픔, 고통의 자리에 항상 하느님께서 동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하느님과 함께 극복해가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에, 즉 그들 안에 어렵고 힘든 삶을 하느님의 도우심과 지지를 통해서 행복으로 바꾸어 갈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행복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항상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응원하고 지지해주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잊으면서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삶을 응원하고 지지해주십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오늘도 우리 자신의 삶을 맡기면서, 내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도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지훈(미카엘) 신부 군종교구 멩호(수도기계화보병사단) 성당 주임
신앙인의 소확행
소확행’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 등장하는 말인데요,
소확행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합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만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의 기분을 ‘소확행’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의 소확행은 무엇일까요?
장소가 어디든지 언제든지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 묵주를 꺼내서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평화 속에 머무는 것, 시간이 허락한다면 조용한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는 것, 성경 필사를 하는 것, 어디를 가면서 좋아하는 성가를 흥얼거리는 것, 등등. 하느님 안에 머무르면 얼마나 행복한지요.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루카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을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께서 하신 말씀,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는 말씀이 더욱 가슴에 와닿습니다.
행복을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께 돌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됩니다.
행복하고 싶습니까? 그럼 행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릅시다.
옥계본당 주임 대구대교구 이기환 사무엘 신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군중들은 경제적으로 빈곤했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 특히 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은 구걸로 겨우 연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들은 구원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자, 억압받고 실망한 하느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행복하다 칭송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그들의 가난과 굶주림과 서글픔이 그 자체로 어떤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하느님의 나라가, 하느님의 다스림이, 하느님의 개입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버림받았다 여겨졌던 이들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받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병자들과 장애인들이 치유와 위로를 받고, 배고픈 이들이 빵을 얻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그들 곁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곳, 죽은 뒤에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곳, 예수님께서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는 곳, 예수님께서 세속의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곳 바로 그곳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만나고 있고, 그분의 구원을 체험하고 있다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곁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억지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우리 인간은 예수님이 있어야만 완전히 충만해질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바라보며 그저 좌절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약하고 부족하기에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찾고 만나는 이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진정 가난한 사람입니다. 즉,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고, 오직 주님으로 인해, 주님과 함께하는 동안은 자신의 가난이 전혀 문제 되지 않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난한 존재이기에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할수록 우린 예수님의 구원을 더 많이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했던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내가 가난해야 가난한 사람들 곁에 계신 예수님과 진정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도움은 아무런 대가 없이 무상으로 주어집니다. 그 은총 안에서 그저 우린 감사하고 기뻐하는 아이가 됩니다. 주님의 도움을 받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우리도 주님처럼 이웃을 돕는 삶을 사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서시몬 시몬 신부 마산교구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밤새도록 어부들은 고기를 잡으려고 하였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합니다. 지친 몸을 추슬러 이제 슬슬 철수하려고 하였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조금 더 깊은 데로 가서 다시 한번 그물을 던져 보라고 합니다.
일생을 고기 잡는 일만 해왔던 고기잡이 전문가들에게 이 말은 꼭 자신들을 무시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길래 우리 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지? 좋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밑져 봐야 본전이니까 한번 그물이나 던져보자.’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던진 그물이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많은 고기가 낚인 것은 정말 처음입니다. 이런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일을 경험하면서 어부들은 정말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와 오늘 땡잡았네, 오늘 돈 좀 벌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놀라운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이런 마음의 표현이 베드로의 입을 통해 드러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ㄴㄷ)베드로는 주님께 자신을 떠나 달라고 부탁드리지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고기를 많이 낚은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바로 베드로와 동료들이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일들이 황당하고 당황스럽고 부담스럽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이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거나 배척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놀랍고 두렵게 느낄 만큼 주님은 우리를 쓰시기 위해 새로운 기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셨지만 우린 그 결과에 집착한 채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할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보면서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계만수 안토니오 신부 부산교구 서동성당 주임
하느님이 주시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 늘 복 음 에 서 예 수 님 은 가 난 한 사 람 들 ,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부유한 사람들, 배 부 른 사 람 들 , 웃 는 사 람 들 은 불 행 하 다 고 하십니다. 현실적으로 불행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시고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오히려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당황스럽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가난한 환경을 택하여 태어나셨고, 가난한 목동들에게 자신을 처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 나자렛 회당에서 당신 사명을 천명하실 때는 좀 더 분명히 당신 의도를 밝히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하느님이 가난한 이들을 택하여 그들 편에 서시고,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가난과 고통, 불행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로 하셨으니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향해 행복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얻고 그 복을 누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야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편으로 택하신 가난한 이들을 가까이하고 그들과 삶을 나누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받고 억압받는 이들 편에 서계시며 그들을 해방시켜주려 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기꺼이 가난한 이웃과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 가까이 머물수 있고 하느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웃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시는 것은 부자들을 저주하는 말씀이 아니라 질책이며 새로운 삶에로의 초대입니다. 재물에 대한 우상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은 그 우상을 버리고 가난한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가 나눔과 섬김의 삶을 시작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 편에 서게 되고 하느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내가 속한 부류(가난한, 부유한)를 따질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재물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가난한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고 다가가 나누고 섬기는 삶을 시작하면 주님이 주시는 참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물질적 우상을 받들며 어려운 이웃의 처지를 외면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면 하느님과도 거리가 멀게 살아가기에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 가까이 살기위해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그들과 나누며 사는 삶이 바로 참된 행복의 비결입니다.
안동교구사회복지회 김학록 안셀모 신부
‘주님인 줄 알았나?’
이토록 긴 코로나가 3년째 세상을 흔들어 놓을 줄 그 누가 알았을까요? 처음에는 ‘코로나, 그거 별거 아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아주 특별한 것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주변에서 ‘확진’이란 말만 나와도 이리 저리 피하는 모습과 아예 인적이 끊겨 한적한 곳으로 바뀌는 모습도 봤습니다. 자영업자나 소상공인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곳곳에 비어 있는 상가도 쉽게 눈에 띄는 요즘입니다. 코로나가 이렇게 세상을 어렵게 할 줄 그 누가 알았을까요?
오늘 복음은 물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이 나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결과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존중하긴 했지만, 그분이 주님이란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주님”이라 부르며 떠나달라고 간청했지만, 사실 그분이 주님이라는 점은 완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지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러자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주님’이란 것을 알았더라면, 죄 많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그렇게 두려워하기만 했을까요? 아마도 다른 말과 행동이 앞섰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짧지만 강렬한 만남에서 차츰 그분의 하느님 다움, 주님 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 나섰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주님 다움이 말로 증언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비춰진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이 주님이심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크나큰 큰 기쁨이고 행복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요. 정말 좋은 사람인데, 그 사람의 참 가치를 뒤늦게야 알고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 좀 더 친절하게, 좀더 잘 대해주었어야 하는데.’ 하는 경우 말입니다.
이번 주일 복음을 통해서, 뒤늦게 ‘아! 그땐 정말 몰랐지. 누가 주님인 줄 알았겠어?’ 하고 가슴 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해 봅니다. 우리 삶 속에 은근히 또 살며시 다가오시는 주님을 좀 더 빨리 알아챌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최종환 베드로 신부 의정부교구 화정동 주임
행복은 사랑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4가지 행복과 4가지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을 바라보며 ‘왜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며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이 행복한지, 왜 부유하고 배부르고 지금 웃고 사람들이 좋게 말하는 이들이 불행한지’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의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풀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에서의 “가난한 사람”은 누군가의 어려움을 같이 공감하고 그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기에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가난을 선택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어려움에 처한 이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어 그가 도움을 받으며 희망을 갖고 기쁨을 느끼는 것을 바라봅니다. 여기서 그는 도움을 받은 이뿐만이 아니라 자신 또한 기쁨을 느끼며, 이러한 사랑의 나눔을 하느님께서 계획하셨고 자신을 통해 실현시키심을 느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러한 사랑의 나눔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기에 행복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굶주리게 되고 울게 되고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된 사람들 모두 약자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였던 이들이며, 이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하지만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하기에 행복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약자를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유하고 배부르고 지금 웃고 사람들이 좋게 말하는 이들은 오직 자신만 사랑하는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약자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사랑하기에 하느님과 사람들과 멀어지고 자신이 약자가 되었을 때 아무도 그의 고통을 공감하지 않으려는 입장이 될 것이기에 이들은 불행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과 불행은 약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느냐, 아니면 자신만 사랑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해볼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금 상태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여 불행한 상태에 있더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약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또 다른 오늘 하루가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오늘 하루를 새로운 선택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자신 안에 갇혔던 순간들 속에서 보이지 않던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사랑하려 하면 점점 더 우리에게 보이게 될 것이고, 변화된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희망을 잃어가던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모두이지만 힘을 내어 우리보다 어려운 이들을 사랑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나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
김상우 토마스 신부 인천교구 온수 본당 주임
행복(幸福)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잊고 살았는데 교구청 홍보국에서 숲정이 강론을 부탁하는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아, 올 것이 왔고만!’ 매주 성당 주보에 강론을 실으면서도 숲정이 주보에 보내는 강론은 왜 이리 쓸 때마다 부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부담감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써서 홍보국에 보내고 나면 내용이 부족하여 부끄럽기는 해도 끝냈다는 후련함에 작은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의 전례는 그 행복(幸福)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 속에서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고 오히려 불행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루카 6,24-25) 예수님은 왜 보통 사람들이 꿈꾸고 바라는 행복한 삶을 불행하다고 하시는지 생각해 봅니다.
사실 세상 속의 행복은 더 높고, 더 크고, 더 많은 것이 우선이 되어 늘 최고만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최고만을 지향하면 아무리 가져도 만족하지 않고 더 목마르게 되어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아주 사소한 일 같지만 제가 7시 저녁 미사를 하기 위해 6시쯤 밥을 먹는데 그때 과식을 하면 미사 내내 불편함을 느낍니다. 오히려 물 한잔으로 허기를 때우고 속이 비어 있는 상태로 미사를 하면 편안합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행복은 결국 욕망이 과식이 되어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을 느끼게 하기에 예수님께서 불행하다고 선언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세상 속에서만 행복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예레 17,5-6)
우리는 절대로 메마르고 소금 땅 같은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남들은 일요일이라고 집에서 쉬고 있지만 우리는 성당에 나와 행복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왔다.”(마태 20,28) 이 섬김과 나눔이 우리가 지향하는 행복 조건의 열쇠입니다. 저 같은 신부가 죽으면 입만 천당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기에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운’ 체험을 가끔 합니다. 이때 저는 예수님이 몸소 하신 섬김을 이해하였습니다. 또한 많은 신자가 밥을 사줄 때보다 어쩌다 제가 사줄 때 더 기쁨을 느끼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눔이 다가왔습니다. 섬김과 나눔의 행복은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습니다.”(예레 17,8)
지난해 대림을 앞두고 했던 사제 연례 피정 중에 지도 신부님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국의 철학적 표현 중에 ‘군자는 결함(缺陷)을 추구하고 소인은 완전함을 갈구한다.’라는 말이 있답니다. 사실 ‘결함’은 추구하기보다는 극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결함이란 부족이 아니라 비움이라고 말입니다. 비움에는 여백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여백은 더 멀리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
줍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신빈(神貧)이고 여기에서 행복이 온다 생각합니다.
이완재 타대오 신부 (전주교구 호성동성당)
참된 행복으로
제가 사목을 하고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종종 던집니다. “행복하면 떠오르는 단어 말하기.” 이 질문을 던지면 빠짐없이 그리고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가 돈입니다. 학생들의 인식 속에 돈이 곧 행복이라는 오답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학생들이 선호하는 진로를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적성보다는 돈을 많이 벌 수 직업을 택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인간이 중심에 있으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가 우선되어야 하는 교육 또한 물질 만능주의가 지배하게 되면서 학생들에게 돈이 행복의 전부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오늘날 현실입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과 불행 중 불행을 택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이는 드물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불행 속으로 빠져들고 있으면서 행복하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선포하시면서 우리가 희망을 걸어야 할 곳은 바로 당신 자신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희망을 두면서 살겠다고 다짐을 한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불행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받아들이는 데 방해 요소를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 모두는 인간적인 요소, 세상의 것에 집착을 보인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이는 세상에 대한 욕심은 세상이 주는 만족에 혹하게 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루카 6,23).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의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뽑으신 제자들과 함께 기도를 하신 산에서 ‘내려와’ 많은 군중 앞에 서십니다. 이 모습은 마치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그리스도의 강생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행복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루카 6,23) 것입니다. 지상에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셨듯이 세상 모든 이가 행복에 대한 말씀을 받아들여 하느님 나라에서 기뻐하고 뛰놀 수 있도록 모든 이와 ‘함께’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함께 그분의 나라로 ‘올라갈’ 준비를 이 지상의 삶 안에서 올바로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양선규 요셉 신부 청주교구 양업고등학교 교목
행복의 이유
“당신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모두 다 “그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은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면 행복하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뭐냐고 묻는다면? 돈, 건강, 화목한 가정, 좋은 직장, 멋진 집 등등을 열거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돈을 첫째로 꼽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이유를 가난, 굶주림, 슬픔과 우는 것, 박해받는 것이라고 하시니 도대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참으로 난해하기만 합니다. 한마디로 생활필수품의 부족, 굶주림, 괴로움, 박해 등은 우리가 피해야 할 것들인데 오히려 행복의 이유가 된다니?
이 세상에 가장 축복받고 행복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한 부류는 나병환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들입니다. 처절하게 냉대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오직 하느님만이 유일한 희망이 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기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성직자입니다. 이들 또한 세상 것에 희망을 두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행복합니다. 생활의 풍족함과 많은 것을 갖추고 살다 보면 자연히 세상 것에 의탁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딱히 의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요즘같이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 많은 시대에는 더더욱 하느님을 굳이 찾지 않더라도 즐겁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하느님과 멀어져 가는 생활을 하게 되니, 이 자체가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물론 생활의 풍족함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막 걷기 시작하는 아이를 세워 놓고 부모가 앞에서 손짓하며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기우뚱하며 한두 발 걷다간 여지없이 넘어집니다. 부모가 잡아 주려니 하겠지만, 잡아 주지 않습니다. 즉 ‘사람에게 의탁하지 말라. 심지어는 부모도 믿지 말라. 네가 믿을 곳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다.’ 라며 어렸을 적부터 신앙 교육을 시킨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는 인간에게 의지하는 사람을 저주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축복한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자신의 믿음을 자기 자신에게, 돈에, 소유에, 사람들 눈에 힘 있어 보이는 것에 둠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있기에 하느님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한마디로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고 자기 자신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을 알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으로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확신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처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들 생명과 열매의 원천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삽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힘겹고 고통스럽고, 박해받고 하는 이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가난, 굶주림, 박해 그 자체가 행복한 게 아니라, 그로 인해 하느님과 함께해서 행복한 것입니다.
아멘.
최일호 라우렌시오 신부 춘천교구 강촌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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